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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학과 국가통합 (중대신문, 2007. 9.3)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07-12-30 15:12
동남아시아의 문학과 국가통합 : 민족을 하나로 묶어 상상의 공동체를 이룬다
 
자연자원의 보고이자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동남아시아는 일찍이 동서교류의 관문 역할을 해왔고 자연스럽게 동방무역의 중심축을 형성하였다. 해상 실크로드 시대에 유럽 각국은 동남아시아의 요충지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식민통치의 발판을 다졌으며, 영국이 말레이시아를 100년,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350년, 그리고 프랑스는 베트남을 100년 이상 통치하였다. 유럽의 번영은 동남아시아인들의 피와 땀의 결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남아시아 각국은 제2차 대전 후 독립을 맞이하면서 민족 내부의 통합이라는 중요한 과제에 직면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각국의 고유 언어로 생산된 문학작품이다. 앤더슨이 말한 대로 민족은 원초적으로 구성되는 자연적 집단이 아니고 문화적으로 구성된 ‘상상의 공동체’이다. 이전의 종교 공동체나 왕조가 붕괴하고 의미 있는 공동체로서 민족이 등장하면서 인쇄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한 자국어 신문 및 소설 등 출판물의 대량생산이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국가를 통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싱가포르의 국어이며 태국 남부의 5개 현에서 통용되는 등 3억여 명의 언어사용인구를 가진 말레이어는 말라카 상인들의 향료무역 덕분에 일찍이 인도네시아군도 지역의 교통어 역할을 하였다. 인도네시아는 1928년에 말레이어를 자신들의 국어로 정식 채택하였는데 그 이유는 당시 언어사용인구수가 훨씬 많고 존칭과 하대가 지나치게 복잡한 자바어에 비하여 언어습득이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말레이어를 매재로 말레이어권에서 자생발전한 문학 유산은 매우 풍부하다. 운문 형식으로는 전통시형식인 만뜨라(呪文), 빤뚠(4행시), 샤이르(자유시)를 비롯하여  1연 2행, 1행 4~6자의 나잠, 무정형으로 사회 관습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담는 뜨롬바, 신을 칭송하는 내용을 반복적으로 읊는 디끼르, 1연 2행, 1행 3~6자의 충고, 교훈적인 내용의 연작시 구린담, 자유 형식의 시로 해학·비유를 담은 슬로까 등이 있으며 이들은 저마다의 특징으로써 이 지역 사람들의 삶을 표현하고 있다. 산문 형식의 전통문학 유산은 말레이어권의 근대 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허구적 이야기체의 히까얏을 들 수 있다.

식민통치 시대의 문학은 이 지역 국가와 민족을 통합하는 것 이상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네덜란드 식민통치 정부는 당시 반 덴 보쉬 총독의 지휘 아래 1830년부터 인도네시아(당시는 네덜란드령 인디아)에서 환금작물을 재배하는 강제재배제도(Cultuurstelsel)를 실시하였다. 네덜란드는 피식민통치 국민들을 착취하여 재배한 작물을 유럽에 내다 팔아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40년 동안 계속되던 이 제도는 1870년에 폐지되었는데 여기에 기여한 사람들이 물타툴리, 비탈리스, 그리고 후벨과 같은 인물이었다. 그 중에서도 네덜란드의 관리로 인도네시아에서 20년 동안 근무한 적이 있고, 네덜란드의 셰익스피어로 추앙받는 물타툴리의 소설 『막스 하블라르』(1860)의 역할을 빼 놓을 수 없다.
유럽 식민통치의 가면을 백일하에 발가벗긴 이 소설은 인류역사상 가장 통렬한 반식민주의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는 주인공 막스 하블라르를 통하여 강제재배제도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파헤쳤다. 네덜란드 본국에서도 이 소설을 통하여 자국민들이 얼마나 가혹하게 피식민통치 국민들을 착취하는지를 알게 되었고, 이 제도를 폐지해야한다는 여론에 밀려 네덜란드 정부는 결국 강제재배제도를 폐지하였다.

독립 이후에도 말레이어권 문학은 국가의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300개 이상의 종족이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적 배경 하에서 살고 있는 인도네시아는 전술한 바 말레이어를 통한 국가와 민족의 통합을 꾀하고 있다. 특히 인도네시아에 민족주의 운동이 시작되는 20세기 초에는 통일된 언어와 문학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인도네시아 언론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띠르또 역시 민족주의 운동에서 말레이어와 말레이어로 된 신문과 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정치인 무하맏 야민도 말레이어로 쓴 시를 통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표출하였다.

말레이시아 역시 말레이어 및 말레이문학의 역할이 국가통합에 매우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한다. 말레이계, 중국계 및 인도계로 구성된 말레이시아에서 말레이어를 사용하고 이슬람을 신봉하면 토착인(bumiputera), 그러니까 말레이계로 분류된다. 전체 인구의 55% 정도인 말레이계가 그들의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할 것이 분명하다. 말레이어 중시 정책은 자연스럽게 말레이 문학의 중요성으로 이어지며 상대적으로 중국계나 인도계가 중국어 혹은 인도어로 생산한 문학과 변별적인 지위를 얻게 되었다.

‘다양성 속의 통일’을 주창하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계를 중심으로 국가의 통합을 이룩하려는 말레이시아에서 언어와 문학의 역할과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오랫동안 피식민통치의 쓰라린 경험을 겪은 동남아의 여러 나라들이 고유의 언어와 문학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그들의 존재의 이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고 영훈(한국외대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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